2004년 6월 1일 화요일

<하류인생>에 대한 생각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극중에서 주인공 최태웅은 1972년에 서른살이었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의 나이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아버지와 동갑이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정확하게 나보다 한 세대 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임권택 감독은 그 시대를 살았고, 그로부터 또 30년을 더 살면서 두 세대를 통과한 인물이며,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온 나는 내 아버지와 최태웅의 바로 다음 세대에 태어난 그들의 자식이다. <하류인생>은 극중인물과, 만든 사람, 보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런 기묘한 삼각구도를 염두에 두고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1957년 어느날에 무작정 시작하여, 1972년의 어느날 느닷없이 끝난다. 태웅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57년의 어느날, 남의 학교로 느닷없이 뛰어들어 난장을 치기 시작하는데 이 난데없는 스크린 속으로의 태웅의 등장은 그 앞의 세월, 그러니까 태웅의 개인사적인 어린 시절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더 나아가 57년 이전의 한국의 시대상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방 이전에 태어나 한국 동란을 겪으며, 휴전 이후 자유당 정권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상식적인 설정이 관객이 머리속에 미리 마련되어 있을 것을 굳이 전제하지 않으면, 영화의 텍스트 자체에서 주어지는 정보란 극히 미약하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러한 시대상의 전제를 (관객이) 깔고 있다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는데 하등 도움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당황스러움은 러닝 타임 내내 지속된다. 영화는 태웅의 삶을 드문 드문 건너가며 짚어주고, 그 와중에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자막과 함께 잠깐씩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것은 영화가 끝을 맺는 1972년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1972년의 어느날, 태웅은 정보부 요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개천가 어느 오두막에 숨어 있다가 혜옥과 재회한다. 거기에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익히 알고 있는 유신 이후의 박정희 정권의 어떤 정치 행위나 시대상과는 별다른 관련없이 '태웅이 3년후 전업했고, 그의 인생이 맑아질 조짐을 보였다'는 자막만으로 3년의 세월을 건너뛰면서.

 

그러니까 이 영화는 페데리코 펠리니 말년의 노년적 술회에 비견될 수 있는 임권택 자신의 '개인사'적인 서술이며, 사(史)에 얽힌 사(私)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태웅은 역사를 바꾼 위인도 아니고, 역사를 이끌어간 선각자도 아니다. 배경으로 제시된 날짜들이 한국의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태웅의 삶 속에서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그저 그런 오늘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들속에 태웅과 전혀 무관하게 시작된 어떤 역사적 사건이 점차적으로 진행되면서 시나브로 그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류인생>에서 역사는 이렇게 개인과 시대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드러난다. 태웅은 역사의 주체 - 이런것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 는 아니었으되, 역사의 언저리에서 살아간 수백, 수천의 범인(凡人)중 하나였고, 이 영화가 위인이 아닌 범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는데 있어 꽤나 중요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개인사'적 서술이 가져올 수 있는 기억의 재구성을 근간으로 한다. 지나간 30년의 세월이 머리속에서 정리되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믿을수 없는 속도감의 영화'라는 정성일의 평가가 들어맞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영화는 최태웅의 삶을 도약하듯 훌쩍훌쩍 건너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답지 않게 씬넘버가 186개에 달한다는 것은 한 씬, 한 컷의 지속 시간이 그만큼 짧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한 개인이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정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사람의 머리속에 남은 기억은 의미의 중요성을 따라 연쇄적으로 도약한다. 따라서 한 여자를 보고 결혼을 결심했던 그 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이고, 아이를 낳는 순간이 있으면 그 담에는 곧 그 아이가 이미 자라 있는 순간으로 도약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흐름은 초짜 감독의 영화라면 능숙하지 못한 시나리오 진행 또는 연출의 미숙함으로 보여질만한 요소였겠지만,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들추어 내는 영화, 그리고 백번 용서해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라는 특징때문에 힘겹게라도 수용해야하는 그런 특징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 전체가 하나의 플래시백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이제 영화가 시대를 토막내서 끌어오고, 그안에 담겨진 개인사를 또 잘게 미분하면서 순간 순간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 의아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인가? 결국 이 영화 <하류인생>은 같은 감독이 만들었던 <장군의 아들>류의 영웅 서사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액션 영화도 아니며, 더군다나 암울했던 시대를 우회하는 비겁한 알레고리도 아니다. 노감독의 독백은 영화가 마무리지어진 1975년으로부터 또다시 3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 돌아보는 전반부 반토막의 삶에 대한 읊조림이며, 그렇게 살아간 아버지들의 자식들이 같은 30대를 맞는 지금 시점에 와서야 그들에게 힘겹게 내어놓는 회한어린 목소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보는 자세가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영화에 어떠한 과장된 감정을 싣지 않는 다는 점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 영화가 60년대를 다룬 어떤 기록영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죄책감이나 용서, 참회, 고해 따위의 단어들은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시종일관 '그땐 그랬다'에서 시작해서 '그땐 그랬다'로 끝나는 서술의 자세가 다소 무책임해 보이거나 비겁해 보일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단지 젊었던 과거의 자신을 스크린으로 불러내어 날뛰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세대가 보기엔 충분히 우스꽝스럽고, 이해 불가능하고, 무엇이 어리석었던가를 느낄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거기에서 오는 반성적 효과는 충분할 것이라는 감독 본인이 판단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한다.

 

느닷없이 건너뛰는 '3년'의 자막, 그리고 넌지시 던지는 '인생이 맑아질 조짐' 이후에도 최태웅이 과연 맑은 인생을 살았는가를 우리는 알수가 없다. 그때도 시대는 탁류였고,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탁류'를 헤엄치는 한마리의 가련한 '물고기'에 불과함을 알지 못한다. 역사를 변혁하는 불세출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자는 오만하다.

 

노감독의 99번째 영화는 자신의 세대를 끌어와 현 세대에게 펼쳐놓고 다시 그들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무조적인 용서와 사랑을 이야기하는게 아니다. 하류가 아닌 놈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위대한' 작품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류인생>은 작고 미세하게 지나쳐간 것들을 보듬기위해 스스로 축소되기를 원한 한 노감독이 남긴 선물과도 같은 영화이다. 영화속에서 살았고, 다시 그 삶을 영화로 드러내는 방식을 평생에 걸쳐 온몸으로 체득한 그의 진득함에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ps. 쓰는 과정은 어려웠으나, 갈길은 멀고, 무언가 굉장히 맘에 들지 않는 글임을 알면서 내놓습니다.

 

 




< 출처 : 뮤크박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