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25일 금요일

only when I sleep.. <주홍글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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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옆에서 나오고 있으니... 긴말 안해도 되겠고..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단

 

한 배우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위기다.

 

연초부터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드라마를 심상하게 보고

 

이런 저런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역시 현실에 부딪히면 다르다.

 

이런 일 앞에서

 

죽은 자의 책임과 남은 자의 삶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걸 보면.

 

 

 

그렇게 쉽게... 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겠지.

 

어느 누가 쉽게 죽을 수 있을까?

 

 

 

부디 좋은 곳으로 갔기를... 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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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이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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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y Wh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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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e only just a dreamboat
Sailing in my head
You swim my secret oceans
Of coral blue and red
Your smell is incense burning
Your touch is silken yet
It reaches through my skin
And moving from within
It clutches at my breast

But it's only when I sleep
See you in my dreams
You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down
But I only hear you breathe

Somewhere in my sleep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down
But its only when I sleep

And when I wake from slumber
Your shadow's disappear
Your breath is just a sea mist
Surrounding my body
I'm workin' through the daytime
But when it's time to rest
I'm lying in my bed
Listening to my breath
Falling from the edge

But it's only when I sleep
See you in my dreams, (dreams)
You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down
But I only hear you breathe
Somewhere in my sleep, (in my sleep)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down
But its only when I sleep
It's only when I sleep

[Sharon & Andrea solo]

Up to the sky
Where angels fly
I'll never die
Hawaiian High
In bed I lie
No need to cry
My sleeping cry
Hawaiian High

It's reaching through my skin
Movin' from within
And clutches at my breasts...

But it's only when I sleep...
See you in my dreams, (dreams)
You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down
But I only hear you breathe

In bed I lie
No need to cry
My sleeping cry
Hawaiian High

But it's only when I sleep... aaaaaaa....
Got me spinning round and round
(Turning upside-down)

Up to the sky
Where angels fly
I'll never die
Hawaiian High
But it's only when I sleep...

[Fade out]

2005년 2월 14일 월요일

맨온파이어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장악한 감성 액션 대작!'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있는 이 영화 <맨 온 파이어>는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토니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토니 스콧이라하면 <탑건>, <크림슨 타이드>, <트루 로맨스>, <라스트 보이스카웃>등으로 한때 영화를 내놓을때마다 박스오피스 수위권을 수월하게 점령하던 감독이자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의 동생이기도 한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설명하는 이유는 그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성이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토니 스콧이 누구지?'라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사람도 없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이 두 형제는 꽤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 흥행의 부침이 심하다는 면에서는 유사하나, 리들리 스콧이 60이 다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글래디에이터>나 <블랙호크다운> 그리고 곧 개봉할 <킹덤 오브 헤븐>과 같은 블록버스터를 찍거나 <매치스틱 맨>류의 드라마를 오가며 일정치않은 행보를 보이는데 비해, 토니 스콧은  줄기차게 인물이 주가 되면서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은 그런 '액션 영화'에 대한 고집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액션 장르에 대한 자신만의 해법을 찾고 있는 듯 하다. 과연 그것이 장차 토니 스콧 자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맨 온 파이어>는 그런 토니 스콧의 고집이 충분히 반영된 영화이다. 같은 이유로 극과 극을 달리는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아야만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박스 오피스 상위권에 꽤나 오랫동안 랭크되었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들이는데 성공했지만 한국에서는 비수기에 개봉되어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비디오 대여점에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성공했지만 한국에서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연배우'의 문제와 '액션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의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할리 조엘 오스먼트 이후 가장 소름끼치는 아역 연기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다코타 패닝과 시드니 포이티어의 뒤를 잇는 연기파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이 보여주는 조화는 두 사람을 투톱으로 내세운 것이 전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두 사람이 미국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을 만큼의 충분한 티켓 파워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 여름 시즌에 개봉할 스필버그의 영화 '우주전쟁'의 30초짜리 TV spot을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다코타 패닝의 압도적인 표정 연기는 그 영화의 주연이 톰 크루즈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맨 온 파이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그저 미국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가능한 일이지 한국에서는 아닌듯하다. 한국의 외화 배급에는 학술적 근거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뢰 가능한 '미신적' 통계가 있는데 그런 사례가 '흑인이 주연인 영화는 배우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흥행에 성공할 수 없으니 비수기에 개봉하라'는 것과 '아역배우가 여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도 흥행 가능성은 없다'는 것들이다. 가끔 이런 영화들 중에서도 관객 동원에 어느 정도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요 몇년 사이와 같이 외화들이 한결같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저런 떠도는 말들에 대한 신뢰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맨 온 파이어>도 그 공식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 시장에서는 별반 힘을 못쓰고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주연배우의 문제와 더불어 '액션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액션 = 비디오용'이라는 약간은 생뚱맞은(?) 등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의 비디오 대여 시장이 활황이던 그때에도 비디오 시장에서 대여 1위를 차지하는 영화는 언제나 '액션 장르'로 분류되는 영화들이었다. 척 노리스의 영화나 스티븐 시걸, 장 클로드 반담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단 하루를 상영하고 내려와도 아쉽지 않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영화들이 상영당시 아무리 푸대접을 받아도 - 푸대접 받을 만한 영화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 비디오 시장에 출시하면 본전은 뽑고도 남을만큼의 성공을 늘 거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액션 영화를 극장까지 찾아가서 보는 몇몇의 매니아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비디오 출시를 목적으로 한 형식적인 개봉이 줄곧 이어졌고, 이는 곧 이 장르가 푸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업자득'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한국 시장의 예를 들어 말하긴 했지만 그것이 비단 이곳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맨 온 파이어>는 이러한 시장 상황하에서 분명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도 아니었을 테고, 배급한 사람조차 성공 가능성을 별로 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두루두루 흥행에 불리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맨 온 파이어>였지만, 이 영화 자체가 아예 함량 미달의 작품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앞서 잠깐 언급한 토니 스콧의 고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토니 스콧은 장르상 액션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영화들을 계속 찍고 있는 감독이다. <맨 온 파이어>는 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30분에 달한다. 스트레스를 확 날려줄 화끈한 액션물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설사 <옹박>에서 토니 쟈가 보여준 것과 같은 입이 떡 벌어지는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해도 그것이 2시간 이상 지속 된다면 결국은 지루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액션 영화가 2시간을 넘지 않고, 스토리 라인의 부실함을 지적받으면서도 짧게 치고 끝나는 것은 관객들이 그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장르 만들기'의 공식에 의한 것임을 생각할때 토니 스콧의 이 영화는 너무 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의 대부분은 덴젤 워싱턴이 맡은 주인공 '크리시'의 심리적 갈등과 드라마로 채워져 있다. 이게 웬 일인가? 액션을 보러 들어갔는데 드라마라니. 알콜중독과 심리적 불안 상태에 놓여 있는 전직 CIA 요원 '크리시'가 유괴 사건이 횡행하는 멕시코시티에서 9살 소녀 '피타'의 보디가드를 맡게 되고 이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다시 찾게 되지만 끝내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는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애시당초 액션물의 단순 명료한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A. J. 퀸넬의 동명의 원작 소설이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까지 합치면 세번이나 영화화 되었다는 것도 그 안에 그만큼의 드라마틱한 매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테고, 거꾸로 토니 스콧이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몇번의 카체이스와 총격전을 제외하면 지극히 소박한 이 영화는 그닥 '액션영화'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크림슨 타이드>가 잠수함 블록버스터를 표방하고 있지만 밀폐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물들간의 갈등 상황이 주가 되었던 것이나, <더 팬>이 스포츠 액션영화처럼 보이면서도 야구 선수와 스토커간의 밀고 당기는 심리 게임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 영화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맨 온 파이어>는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이다. 토니 스콧은 CF 감독 출신답게 여전히 감각적인 화면과 편집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인물'이다. 드라마틱한 시츄에이션에 눌려서 캐릭터가 희생되어 버리는 그런 영화를 원하지 않는 토니 스콧이 늘상 가장 그렇게 되기 쉬운 '액션물'을 찍는 것은 곧 아이러니를 낳는다. 최근들어 부피는 커지고 밀도는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들과의 차이점도 여기에서 나타난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 의식을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려는 토니 스콧의 의도를 <맨 온 파이어>에서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온 파이어>가 훌륭한 걸작은 아니다. 이야기는 길어진만큼 다소 늘어지고, 전체적인 포인트를 잡아내기 힘들만큼 산만하다. 반전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두세번에 나눠져 있다는 것도 이야기의 힘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토니 스콧이 한 장르에 대한 집착과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장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런 고질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맨 온 파이어>는 '액션물'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고 '드라마'로 접근한다면 충분히 볼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선뜻 대놓고 추천하기에 꺼려지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여전히 토니 스콧의 영화는 훌륭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편이다.

 

PS. 토니 스콧의 1986년작 <탑건>이 새로운 스페셜 버전으로 DVD 출시 되었다. 3월 중순경 구입하고 5.1채널로 즐겨본 뒤에 리뷰를 작성할 예정이다. 못다한 토니 스콧에 대한 이야기는 그 때 이어서 하기로 하겠다.

    

 

 

2005년 2월 12일 토요일

[펌] 씨네21에 올라온 황진미씨의 &lt;공공의적2&gt; 비판

내셔널리즘 권하는 영화

<공공의 적2>는 <씨네21> 488호 특집기사가 말하듯 '정치영화’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 영화를 “내 생각이 그대로 대사로 드러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 공공연히 밝히고 있으며, 이 영화의 취지는 “공공의 적에 대해 관객이 함께 분노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 덧붙인다. 문자 그대로 이 영화는 ‘공공의 적’을 전시하고, 적에 대한 ‘공분’(公憤)을 통해 관객의 일체감을 높이고자 만든 일종의 정치선동영화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선동하고자 하는 정치성이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즉 그가 효수(梟首)한 공공의 적은 어떤 적대성을 지니며, 그를 단죄하는 논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처단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려는 일체감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 문제들을 살피면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와 그 효과에 대해 논해보겠다.

이유 1. 서민이나 국민이 아니면 ‘공공의 적’?

‘전편이 패륜아에 대한 분노였다면 후편은 사학재단비리와 정경유착으로까지 사회적 공분의 규모를 확장하여 한국사회의 구조악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한다’(이종도, <씨네21> 488호)는 지적은 피상적으로만 옳다. 가족살해와 이유없는 약자살해는 전·후편의 공통사안이나, 단지 차이점은 ‘악함’이 전편에서는 훨씬 개인에 결부되어 있고, 후편에서는 계급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편의 그가 자본가 계급을 대표하거나, 사학재단비리나 정경유착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좋은 부자를 존경하도록, 너 같은 놈을…”이라는 말로, 그가 나쁜 부자의 표상일 뿐, 자본가 계급일반을 표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사학재단 일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도 아닌데, 안 이사에 의해 눈물겹게 회고되듯 ‘사학의 길’은 분명 ‘명예로운 사도의 길’이며, 그토록 신성한 재단을 계속 운영치 않고 매각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이다. 즉 사학재단의 운영 자체에 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학재단을 팔아치우는 것이 비리’라는 것이므로, 이 영화는 TV 보도물이나 <두사부일체>보다도 사학재단비리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경유착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나? 사건은 수년 전부터 무수히 터져나왔던 ‘*** 게이트’, ‘@@@ 리스트’의 하나일 텐데, 뇌물수수는 다반사이며, 대가성 여부도 불분명하고, 둘간의 연대도 공고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합이 개인 대 개인의 연줄일 뿐 ‘재벌과 정부’간의 구조적인 정경유착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공공의 적’이어야만 하는가?

감독이 그에게 부여한 가증스러움의 핵심은 스스로를 귀족이라 생각하는 미국 시민권자가 사학재단을 팔아서 외국으로 뜨려 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죄상은 첫째, 귀족의식을 갖고 있으며(‘루이 윌리암~스 세바스천 주니어 3세’의 대사, “천한 것들!”이 자주 인용된다), 둘째, 미국 시민권자로 ‘국부’를 유출하려는 것(국민경제의 적)이다. 그가 ‘서민’이 아니고,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분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유 2. 민족주의자 검사 강철중이 인민의 벗?

강철중은 의협심으로 패싸움에 나섰다가 단체기합을 받으면서 세상을 알았다고 회고한다. 패싸움의 군중심리와 단체기합의 폭압성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그는 오직 평등치 않음에 분노한다. 그는 ‘전체주의’ 속에서 ‘평등주의’와 ‘힘(!)’을 갈망하여 검사가 된다. 그는 검찰의 임무를 ‘나쁜 놈들 잡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는 법과 정의를 동일시한다. 아니 법보다 정의를 갈망하여, 법을 어겨서라도 정의를 수행코자 하는데, 그의 정의는 결국 검찰에 의해 법의 지지를 받는다. 법을 벗어나지만 법으로 완수되며, 결국 법은 정의를 싸안는다.

전작의 강철중은 단순무식 과격하지만 적어도 인륜이 뭔지는 아는 정도의 도덕을 지닌 자였다. 그는 정의를 내세운 바 없고, 끝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법으로 비호되지도 않는다. 법과 정의에서 벗어난 최소한의 도덕의 지점에서, 강철중의 육체성이 발화하는 삐딱하고 친숙한 체취가 전작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후편에서 그의 육체는 개인성을 탈각하고, 검찰이라는 기관의 몸으로 탈바꿈한다. 그는 국가기관의 현신(現身)으로서 정의를 구현하는데, 그런 그가 “메리, 마이클, 제임스에게 그 돈이 들어가…, 그 돈이면 결식아동…”이라며 분개하고, 심지어 “월드컵 때 너무 좋아서 빤쓰만 입고 뛰어다녔다”며 소리친다. 실로 내셔널리즘의 극한이다.

한편 “발포하라, 난… 내 사람 다치게 안 한다”며 충성의 사열을 받으며, 아랫사람의 가족을 챙기는 의리는 또 어떠하며, 부자 후배에게 밥 얻어먹고, 청렴한 검사가 되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오밤중에 라면 냄비 박박 긁는 그의 서민성은 또 어떠한가? 강철중의 이미지는 민족주의와 군인정신, 평등주의와 서민정서가 결합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박정희이든 아니든,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대중의 동일시를 통해 동의를 얻어내고자 하는 ‘대중독재의 지도자상’에 완벽하게 수렴된다. 대의민주주의의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민주주의의 열망을 불태우는 그들은 법 절차보다는 정의를 확신하는 강철중과 닮아 있으며, 그들이 정권을 잡고 나면 가장 먼저 ‘정의사회구현’을 기치로 부패정치인과 깡패를 일소하는 것 역시 강철중의 역할과 유사하다.

이유 3. 국가가 정의고, 국민/서민은 선(善)?

강철중이 홍길동이나 장총찬(<인간시장>의 주인공) 같은 야인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현신이라는 사실은 현실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묘한 영웅담이 검찰의 제복을 입고 출현할 수 있는 것은 검찰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이제는’ 희박해졌다는 감독의 정치인식에 기인한 것인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참여정부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의 결과이자,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되는 현 정권의 이데올로기이다. 즉 오랫동안 국가가 충성의 대상이자 투쟁의 대상이었지만, “참여정부에 이르러 국가의 성격이 달라졌으며, 따라서 국가가 정의의 담지체가 될 수 있다”는 정치적 신념은 근대 이후 경주되었던 ‘국민국가 만들기’의 기획이 드디어 완수되어, 진정한 의미의 국민주권시대가 왔다는 선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신념은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 (아무리 올바른 국가라 할지라도) 국가가 ‘정의’의 내용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정의’가 무엇인지 논의되는 공적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는 축소되며,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율적 시민이 아니라 타율적 국민으로 끊임없이 소환된다. 또한 ‘국민’ 혹은 ‘서민’이 아닌 자를 ‘공공의 적’으로 명명하는 순간, 공공성(公共性) 혹은 공공선(公共善)의 문제가 고작 ‘국민-되기’, ‘서민-되기’의 문제로 왜곡된다. 국민/서민은 선(善)한가? 국가는 정의를, 국민/서민은 선(善)을 담지한다는 이 신념이 바로 국가주의와 포퓰리즘의 모토이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의 육체성 속에 은근히 보여지던 포퓰리즘과 <실미도>에서 국가에 의해 살아지고 사라졌던 그들의 존재로 증명되던 국가주의가 <공공의 적2>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합창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강철중으로 표상되는 ‘대중과 정서적으로 동일시되며, 대중에 의해 위임된 강력한 국가권력’이 곧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는 대중독재의 그림자이다. 또한 관객이 공론장을 국가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도색하는 진정한 ‘공공의 적’을 알아보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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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씨의 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언젠가 강우석 감독에 대해 한번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 꽤나 많은 부분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군요. 그래서 퍼왔습니다. ^^

아드레날린을 치솟게 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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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레날린이 치솟는다? 써놓고 보니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요즘 출퇴근할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면 하루를 견뎌나갈 힘이 솟는다. 비트가 세서 그런것도 있지만 '이 손으로 쌓아올릴 미래'라든가 '꿈마저 잃어버려도 그 미소만은 버리지마'라는 가사가 괜히 나를 자극한다. 굳이 내가 건시드를 좋아해서 그런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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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葉(ことば) みつけられず 思(おも)わず 觸(ふ)れた 肩先(かたさき)
코토바 미츠케라레즈 오모와즈 후레타 카타사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무심코 스친 어깨

君(きみ)は なんにも 言(い)わずに 冷(つめ)たく 降(ふ)りほどく
키미와 나은니모 이와즈니 츠메타쿠 후리호도쿠
당신은 아무말 없이 차갑게 뿌리치네

ほんの 些細(ささい)な 誤解(ごかい)から 幼(おさな)い 愛(あい)は 崩(くず)れてく
호은노 사사이나 고카이카라 오사나이 아이와 쿠즈레테쿠
아주 사소한 오해로부터 미숙한 사랑은 무너져가네

そんな 悲(かな)しい 顔(かお)は 見(み)たくない
소은나 카나시이 카오와 미타쿠나이
그런 슬픈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

夢(ゆめ)さえ 無(な)くしても
유메사에 나쿠시테모
꿈마저 잃어버려도

その 微笑(ほほえ)みだけ 捨(す)てないで
소노 호호에미다케 스테나이데
그 미소만은 버리지마

この 胸(むね) 輝(かがや)いていて
코노 무네 카가야이테이테
나의 마음 속에서 빛나고 있어줘

いつか 誓(ちか)う 僕(ぼく)ら この 手(て)で 築(きず)く 未來(みらい)は
이츠카 치카우 보쿠라 코노 테데 키즈쿠 미라이와
언젠가 맹세하리 우리들이 이 손으로 쌓아올릴 미래는

必(かなら)ず この 惑星(ばしょ)で
카나라즈 코노 바쇼데
반드시 이 별에서

君(きみ)が どこに いたって
키미가 도코니 이타앗테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だけど 今(いま)は 二人(ふたり) せつなく そらした 瞳(ひとみ)
다케도 이마와 후타리 세츠나쿠 소라시타 히토미
하지만 지금은 우리 둘이 안타깝게 외면하는 서로의 눈

出逢(であ)える ことを 信(しん)じて
데아에루 코토오 시은지테
만날 수 있다고 믿으며


一緖(いっしょ)に 眺(なが)めた 星空(ほしぞら)
이잇쇼니 나가메타 호시조라
함께 바라보았던 별이 총총한 밤하늘엔


幾(いく)つも 光(ひかり) 流(なが)れていた
이쿠츠모 히카리 나가레테이타
수많은 빛이 퍼지고 있었지



思(おも)い出(で)は まだ 消(き)えたりはしない
오모이데와 마다 키에타리와시나이
추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耳(みみ)を 澄(す)ましたなら 口笛(くちぶえ)で 吹(ふ)いた
미미오 스마시타나라 쿠치부에데 후이타
귀를 귀울이면 휘파람 불었던

あの 唄(うた)の フレ-ズ 聞(き)こえはじめる
아노 우타노 후레에즈 키코에하지메루
저 노래의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하네


そして 空(そら)の 向(む)こう 心(こころ)が 描(えが)く 明日(あした)は
소시테 소라노 무코오 코코로가 에가쿠 아시타와
그리고 하늘 저편에 마음이 그리는 내일은

も 一度(いちど) あの 場所(ばしょ)で 君(きみ)の 隣(となり)に いよう
모오 이치도 아노 바쇼데 키미노 토나리니 이요오
다시 한번 저 곳에서 당신의 곁에 있으리

きっと 僕(ぼく)ら 二人(ふたり) これから 驅(か)け拔(ぬ)けてゆく
키잇토 보쿠라 후타리 코레카라 카케누케테유쿠
반드시 우리들이 둘이서 지금부터 빠져나갈

日日(ひび)に 意味(いみ)が あるのなら
히비니 이미가 아루노나라
날들에 의미가 있는 거라면

いつか 誓(ちか)う 僕(ぼく)ら この 手(て)で 築(きず)く 未來(みらい)は
이츠카 치카우 보쿠라 코노 테데 키즈쿠 미라이와
언젠가 맹세하리 우리들이 이 손으로 쌓아올릴 미래는

必(かなら)ず この 惑星(ばしょ)で
카나라즈 코노 바쇼데
반드시 이 별에서

君(きみ)が どこに いたって
키미가 도코니 이타앗테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そして 空(そら)の 向(む)こう 心(こころ)が 描(えが)く 明日(あした)は
소시테 소라노 무코오 코코로가 에가쿠 아시타와
그리고 하늘 저편에 마음이 그리는 내일은

も 一度(いちど) あの 場所(ばしょ)で 君(きみ)の 隣(となり)に いよう
모오 이치도 아노 바쇼데 키미노 토나리니 이요오
다시 한번 저 곳에서 당신의 곁에 있으리


だけど 今(いま)は 二人(ふたり) せつなく そらした 瞳(ひとみ)
다케도 이마와 후타리 세츠나쿠 소라시타 히토미
하지만 지금은 우리 둘이 안타깝게 외면하는 서로의 눈

出逢(であ)える ことを 信(しん)じて
데아에루 코토오 시은지테
만날 수 있다고 믿으며


2005년 2월 11일 금요일

30일만의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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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한달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끝까지 보았습니다. 한달이라는 시간동안 드라마 ost를 들으면서, 여러가지 사진을 캡쳐하고 글을 올리면서 드라마의 여운을 즐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드라마를 처음 봤을때의 진동도 가라앉고 사쿠와 아키가 남겨준 좋은 기억을 제외한 그밖의 것들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11부 최종회 다음에 방송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 17년만의 졸업>이라는 특별편은 미처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더군요.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본다는 건 심적으로 너무나 힘들고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에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 특별편만큼은 봐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미 한달이나 지났고, 어차피 많이 잊어버렸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야타베 선생님이 사쿠에게 17년 동안 보관해 두었던 졸업장을 건네주었고, 그제서야 사쿠도, 야타베 선생님도 따스함을 되찾았던 것처럼 저도 이제 이 특별편을 본 지금에서야 그 졸업장을 건네 받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더이상의 눈물은 없을거라 자신했는데 어김없이 제 눈에서 눈물이 나오네요.

 

'전 무엇을 위해 죽는걸까요?'

 

'그건... 남은 사람들 각자가 정하는 것 아닐까?'

 

특별편을 보고 나서 11회의 끝장면을 생각해보니 아키를 알고, 아키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키의 죽음이 남겨준게 무엇인지, 각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각각 정해두었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17년이나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던 사쿠를 다시 고향에 불러준 사람이 야타베 선생님이었다는 것도요. 따라서 그 긴 세월과 이 아픈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도 당연히 야타베 선생님의 몫이었겠죠. 특별편은 단순히 드라마를 재편집한 요약판은 아니었습니다. 특별편을 통해 제가 본 것은 야타베 선생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쿠와 아키'의 이야기였지만, 켄료군도, 오오키군도, 토모에짱도, 사쿠의 아빠, 엄마, 아키의 아빠, 엄마도 각자의 삶속에서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사쿠와 아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키와 야타베 선생님의 저 두마디 대화도 의미가 충분히 있는 것일테지요.

 

아키를 떠나 보낸 하늘을 사쿠가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정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당분간 가슴에 묻어두어야 할 것 같네요.

 

죽는다는 것을 통해 산다는 것의 의미를 더 크게 가르쳐준 시간이었습니다.

      


2005년 2월 10일 목요일

[펌] 떡국 먹고 한살 더 먹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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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국
-설음식② 복을 싸서 먹는 '만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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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준비

설에 떡국을 먹는 이유는 긴 가래떡처럼 오래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설날 떡국을 끓이기 위해서는 설 이틀 전 쯤에 가래떡을 준비해야 합니다. 떡국을 끓이기 쉽게 잘라놓은 떡을 사는 것보다는 떡을 이용한 여러 가지 다른 음식도 해먹을 수 있도록 가래떡의 형태로 빼오는 것이 좋습니다.

가래떡을 빼오면 우선 썰기 적당한 상태가 되도록 굳히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나치게 굳게 되면 썰기가 힘들어지고, 또 덜 굳게 되면 얇게 써는 일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자른 단면이 매끈하고 예쁘게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보통 가래떡은 요즘 날씨로 이틀 정도 바깥에 내놓거나 냉장고에 넣어둡니다. 가래떡이 적당히 굳으면 약간 길쭉한 타원형으로 어슷하게 썰어 줍니다. 지나치게 얇으면 떡국을 끓이면서 쉽게 퍼져버려 떡 특유의 쫀득한 맛을 살릴 수 없으므로 4㎜ 정도 두께가 되도록 썰어 줍니다. 이 떡은 끓이기 전에 찬 물에 담가두었다가 다시 한번 헹궈서 넣어주는데 떡을 빨리 익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떡 겉의 전분질을 조금이라도 미리 제거해 나중에 떡국의 국물이 떡의 전분으로 걸쭉하게 되는 걸 막기위한 것입니다. 떡 자체도 덜 퍼지게 되어 쫀득한 맛을 살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육수 준비

떡국을 끓이기에 앞서 먼저 육수를 내줍니다. 육수는 설 하루 전쯤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지요. 떡국의 육수는 사골 국물과 고기 국물을 반반씩 섞어 사용하는 것이 맛이 있습니다. 사골만으로 끓이게 되면, 너무 진해 느끼할 수 있고 또한 국물의 흰빛이 지나치게 강하게 되어 국물이 깔끔한 느낌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쇠고기 육수로만 하면 국물은 맑지만 아무래도 깊고 진한 맛은 떨어지게 되고요. 그래서 두 가지를 합쳐서 진하면서도 맛있는 국물을 만드는 것이지요.

사골 국물과 쇠고기 육수는 함께 넣고 끓이기 보다는 각각 끓인 뒤 합치는 게 좋습니다. 사골 국물을 내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맛이 잘 우러나는 앞다리 사골로 준비를 합니다. 구입한 사골은 먼저 찬물에 담가 핏물을 제거해 줍니다. 그런뒤 커다란 들통에 넣고 사골이 잠길 만큼 찬물을 부어 먼저 한번 끓여 줍니다. 시커먼 거품이 부글부글 나면서 물이 끓게 되는데 그 거품은 덜 빠진 핏물과 여러 가지 누린내를 내게 하는 것이므로 얼른 그 물을 버려 버리고, 뼈도 건져내서 가볍게 헹궈준 뒤 다시 찬물을 부어 사골 육수를 만들기 위한 물을 끓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부은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 중불 이하로 하여 뽀얀 국물이 충분히 우러나올 때까지 끓여줍니다. 뽀얀 국물이 우러나면 국물을 따로 부어 두고, 다시 그 뼈에 찬물을 더 넣고 끓입니다. 뽀얗게 국물이 우러나면 다시 그 국물을 따로 부어두고, 또 끓여주는 것이고요. 이렇게 모두 3번 정도를 반복해 끓여 그 3개의 국물을 모두 함께 섞고 농도와 맛을 고르게 하면 사골 국물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이 사골 국물을 겨울철에는 베란다, 겨울철이 아닌 때에는 냉장고에 넣어 두게 되면 위에 기름이 뜨면서 굳어 마치 밀랍처럼 돼 쉽게 기름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기름을 제거한 뒤 다시 한번 끓여서 국으로 사용하면 되지요.

사골 국물이 떡국을 끓이고도 남을 분량이면 1ℓ짜리 우유팩에 8부 정도로 높이로 담아 입구를 스테플러나 테이프로 밀봉한 뒤 냉동실의 문 쪽 포켓에 세워 놓고 냉동을 시켜 둡니다. 이후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서 얼어있는 상태 그대로 냄비에 넣고 끓여서 먹으면 되거든요.

쇠고기 육수는 양지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깊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고긱 국물을 낼 때는 덩어리 상태의 양지를 30분 정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 뒤 겉의 물기를 제거하고 찬물을 넉넉히 부어 끓여줍니다. 끓인 물이 아닌 찬물을 반드시 붓도록 합니다. 끓는 물에 넣어 끓이면 물의 높은 온도로 인해 고기의 겉면에 열에 의한 응고가 일어나 하나의 막이 형성되고, 그렇게 되면 고기의 내부에 있는 맛있는 성분이 국물로 나오질 못하고 고기 속에 남아있게 됩니다. 고기는 맛있지만 국물은 맛이 없지요.

일반적으로 고기를 300g 정도 한 덩어리로 육수를 낸다고 할 때 3ℓ정도의 물을 붓고 최소한 40분은 끓여줘야 고기 맛이 충분히 우러나게 됩니다. 완성된 육수의 양은 2ℓ 정도가 알맞고요. 고기가 익으면서 물이 끓기 시작을 할 때 파잎이나 마늘, 양파 등을 넣고 뚜껑을 5~10분 정도 열어두게 되면 고기가 익으면서 나오는 누린내가 쉽게 제거되어 좀 더 깔끔한 맛의 육수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10분 정도가 지난 후에는 뚜껑을 덮고 끓여주어도 좋고 이 때도 불은 지나치게 세지않게 해야 충분히 고기의 맛이 국물에 우러나고 또한 국물이 맑습니다. 고기가 충분히 익고 육수가 맛있게 우러나면 고기는 건져주고 위에 뜬 거품을 걷어 줍니다. 더 맑은 국물을 얻으려면 면보에 한번 걸러 사용해 줍니다.

떡국 끓이기

이렇게 준비한 쇠고기 육수에 미리 만들어 둔 사골 국물을 절반씩 섞어줍니다. 육수가 끓어 오르면 찬 물에 담가둔 떡을 넣어 주지요. 그리고 간을 위해 국간장을 넣어줍니다. 국간장의 색이 지나치게 진하다고 생각되면 소금을 함께 사용해도 좋고요. 떡이 위로 떠 오르는 상태가 되면 익은 것으로 보면 됩니다. 어차피 익힌 음식이었던 것이므로 부드럽게 익은 상태가 되면 가능하면 빨리 건져줘야 덜 퍼집니다.

이렇게 건져낸 떡국을 그릇에 담고 고명을 위에 얹어 줍니다. 고급스런 고명으로는 화려한 화양적이나 파 산적이 있고, 다진 쇠고기로 빚은 완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육수를 내고 남은 고기를 건져 결방향대로 쪽쪽 잘게 찢거나 채로 썰어서 국간장과 다진 파, 마늘, 참기름, 후추로 간을 해서 조물조물 무쳐 고명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차례상에 올릴 것이라면 고기 양념에 파, 마늘 양념은 빼도록 하고요. 여기에 미리 계란을 황백으로 나누어 곱게 지단을 부쳐 고운 채로 썰어 준비를 해두었다가 고기와 함께 정갈하게 담아 내주면 되지요.

(정미경·'요리만 못하는 똑똑한 여자들을 위한 요리책' 저자) SPAN>

2005년 2월 9일 수요일

[펌] 쌀차, 옥수수차 생수처럼 마시기

쌀차, 옥수수차 생수처럼 마시기작성자 :leetear, 등록일 :2005-02-06 18:13:28

하하; 요리까지는 아니고 .. 그냥 노하우를 간단히적어볼께요!

 

저는 어릴적부터 ; 생수를 잘못마셔서 보리차를 주로 먹었거든요

근대 가끔 보리차가 질릴떄가 있어요!!!

 

그럴떄 집에있는 쌀이나 콩으로 간단히 즐길수 있는 차를 적어볼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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