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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6일 토요일

43+7/07/16 태어나고 기르고 죽고...

제주 내려와서 닭을 키우기 시작한지 3개월 남짓. 암탉, 수탉, 오골계, 칠면조 섞어서 닭장 안에 16마리를 넣어 놓고 계란을 낳으라고 지속적인 협박을 한 끝에 오늘 드디어 3개의 초란을 얻었다. 복날까지 계란을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했더니 알아 들었는지 어쩐지 초복 전날 계란을 내놓은 센스하며.


제주도 흙이 묻어 있어서 거뭇거뭇한데 사실 작고 예쁜 토종 달걀이다. 일반 닭도 초란은 꽤나 작은 편인데 토종닭이 낳은 알이라서 메추리 알보다 살짝 큰 정도다. 생각보다 많이 작다. 먹기에 미안할 정도. 


그리고 오늘은 토마토 하나와 가지까지 수확할 수 있었다. 사실 제주 내려와서는 거의 처음 해보는 텃밭 농사라 여러가지를 심었지만 경험치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인데 그래도 뭔가 열리고 또 거둘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곧 우리 텃밭은 대대적으로 개보수를 할 예정이다. 저 정도까지 자란 가지를 수확 했다는 게 어디인가 싶다. 


요즘 식구들이 절반이나 출타중인 관계로 음식을 간단하게 해먹는 중인데 오늘 점심은 닭장에서 거둔 초란과 텃밭의 토마토, 그리고 직접 만들어 숙성한 비빔장을 얹은 비빔면과 마트에서 사온 군만두다. 서귀포에 온 뒤로는 거의 자연식을 하면서 살지만 가끔은 라면이나 인스턴트 만두도 먹는다. 국물이 있는 면이든 비빔면이든 라면의 유혹은 피하기 힘들다. 먹고 싶을 땐 먹는게 쓸데 없는 음식 스트레스를 안받는 방법이다. 

+  저녁엔 서귀포에 나가서 변칙 개봉 중인 <부산행>을 봤다. 영화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는 클리셰 범벅인데 묘하게 흥미롭다. 연상호 감독은 처음으로 실사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지만 근래 어떤 감독보다도 장면 배치와 리듬 조절이 능란하다. 아무래도 여름 블록버스터라면 무엇보다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힘이 관건인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만하다. 심지어 1시간 58분에 달하는 적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엔딩 크레딧이 뜨자마자 관객들이 영화가 더 진행되기를 원하는 듯한 아쉬운 탄식을 뱉을 정도였으니 몰입감도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것이 없으면 기존에 있던 것을 제대로 나열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연상호 감독은 충분히 영리했고 조만간 <부산행>의 전편 격인 <서울역>이 개봉되면 연상호 특유의 냄새가 <부산행>에서 많이 희석되었다는 지적 또한 어느 정도 상쇄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영화가 정식으로 개봉 된 것도 아닌데 더 이상 이야기하면 너무 많은 내용을 미리니름하게 되니 <부산행>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 참는다.

+ 아이를 낳아 본 것도 아닌데 아버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대충 간접 체험. 현실이나 영화에서나. 

+ 마동석 최고. 

2010년 7월 6일 화요일

백투더퓨쳐(1985~)


어느새 1편 릴리즈로부터 25년.
이제는 30년후의 먼 미래였던 2015년에 더 가까워졌습니다.
트위터에서 어느 분의 오역때문에 아침부터
이 영화에 대한 RT가 많이 돌더군요.

그래서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세월은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지치게도 하는 것 같습니다.

future로 back한다는 것.

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


2009년 7월 3일 금요일

구니스에 대한 예전 포스팅 & MORE (2004. 5.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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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14일.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날이다.
 
솔직히 이걸 보고 나서
며칠간 잠을 못잤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미국에 대한 환상은 그닥 없었지만
그래도 안알려진 미국 중소도시 어디쯤 가면
뭔가를 찾아서 헤맬만한
그런 활력이 생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은 너무 답답했고
학교에 가봐야
대머리까진 학생지도부 선생이랑
피바다 운운하던 깡초 음악선생만
활개치던 시절이라
눈에 보이는
진짜 보물은 없어도
그런 보물 있다고 믿고
헤맬 수 있는
어딘가
어느 장소를 원했었다.
 
실로 진지하게 유학을 가거나
한국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고민했던거였다.
 
물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한국을 못떠나고 있으니
앞으로도 영영 그럴 팔자인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삶에 있어서
보물이 될만한 어떤 것을
찾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것쯤
애꾸눈 윌리에게 실어보내도
아깝지 않을때가 오려나?
 
지금까지도
스필버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그런거다.
언젠가 어렸을때
자신이 너무나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
자신이 아꼈던 것들을 잊지 않고
되새기게 해주고 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
 
---
 
그렇게 또 5년이 흘렀다.
 
32살이던 나는 37살이 되었고
여전히 한국을 떠나지는 못하고 있다.
물론 이젠 영화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왠지 이 땅은 2004년보다 못하고
1986년과는 아주 비슷한 그 곳이 되어 가고 있다.
 
다만 다행이라면
삶의 보물을 이제는 조금씩 찾아 가고 있다는 걸까
 
홈시어터 재정비 기념으로
그동안 한 번도 재생해보지 않았던 이 영화 dvd를 틀었다가
 
울뻔했다.
 
이 영화에는...
 
TF2나 T4에 없는
순수한 낭만과 흥분,
 
그리고 진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순진한 열정과 두근거림이 담겨 있었다.
 
 
 
 

2007년 4월 23일 월요일

'우리학교'를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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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수록 영화보기가 팍팍해진다. 조금이라도 괜찮다거나 봐둬야겠다 싶은 영화들은 찾기 쉬운 대형 영화관에선 하루에 두번이나 세번 상영하면 다행이고, 어쩌다가 종일 그 영화를 틀어준다는 극장을 발견하고도 애써 찾아가는 일이 번거로워 포기하게 되는게 현실이 되었다. 다소간 호들갑스럽게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도 이미 교차 상영의 올가미속으로 들어가버렸고, 5월 1일이면 전국 국장의 삼분지 일 이상이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에 휩싸여버릴텐데 불현듯 보고 싶은 영화를 정해놓고 날짜를 잡아놓고 설레이는 기분으로 극장을 찾아갔던 10여년전이 그리워지는건 진정 구태의연한 감상일까?

 

2. 종로와 압구정에 있는 '스폰지하우스'. 애칭 종폰지, 압폰지라고 불리우는 그 극장을 찾아가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를 보았다. 학교 다닐때야 수업시간이든, 쉬는시간이든 귀한 영화, 남들이 안보는 영화, 작은 영화를 볼 기회가 많았다지만 사회인이 되고 영화판에서 멀어진 이후로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400개관에서 개봉한다는 '큰'영화들도 못보는 판에 '작은'영화를 찾아 다닌다는건 그저 마음속 한귀퉁이에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식물인간 같은 영화광의 '자의식'에 인공호흡기를 달아주는 요식행위인지도 모른다.

 

3. 영화가 시작되면서 덜컥 겁이 난건 '조선학교'라는 이름이었다. 이젠 더이상 지도상에 존재 하지 않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학교, 그리고 그 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아이들. 그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는 그 조선학교의 다른 이름이자 이 영화의 제목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향한 찐득한 그리움을 가슴에 깔고, 그것을 다시 삶을 영위하는 원초적 힘으로 되살려내는 '조선인'들과 그 후손들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왜 없어진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우리랑 같은 모습이면서 같을 수 없는가?'

'한국인도, 남조선인도, 북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와 함께 시작된 걱정과 우려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만 나만의 우려가 아니었고, 나만의 걱정이 아니었다. 나에게 단순한 우려였던 어떤 것들이 그들에겐 삶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힘들게 하는 '현실'이었다.

 

4. 영화는 재일조선인의 문제와 함께, 통일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문제, 그리고 남한 사회가 당면한 학교 교육 문제의 대안에 대한 화두까지 많은 부분을 얽어맨채 두시간여를 달려간다. 너무나 생소한 '조선인' 교포들의 모습에, '고향은 남조선이지만 키워준것은 북조선'이라는 가슴 뜨끔한 한마디에,  자칫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마지 않았던, 그러니 이미 상실한 것들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보일법한 모습들에 혼란스런 마음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가슴 한구석에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티없이 밝고, 강하게 자라난다.

 

5. 영화가 끝나고 내 현실로 돌아오면 저 먼 혹가이도의 친구들 이야기는 또다시 멀고 먼 낯선 곳의 일이 되어버린다. 나의 현실에서 저 먼 미국땅의 한 korean이 저지른 대형 총기 살인과 혹가이도의 굳센 조선인들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무엇을 끌어안고 살아갈 것인가?  남한이, 남조선이 영원한 섬으로 남지 않는 길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마음이 얼얼해지는 시간일 수 밖에 없었다.  

2005년 6월 29일 수요일

..

1. 역시 모든 스타워즈 시리즈가 그랬듯 에피소드 3편 역시 한국에서는 그저 그런 흥행 성적을 내면서 막을 내리고 있군요. 한국에서 SF영화가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한 사례도 별로 없거니와 이 스타워즈 에피소드 3처럼 앞뒤 내용을 줄줄이 꿰고 있지 않고서는 그저 눈구경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란 꽤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국 상영이 끝나고 있는 이 즈음 일본에서는 여름 시즌을 앞두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붓는 마케팅과 15시간에 이르는 전편 릴레이 상영으로 붐을 일으켜 보려는 모양입니다. 이럴때보면 일본 사람의 성향은 참으로 기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자란 제가 일본인의 성향을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가끔 미국인들이 미친듯이 열광하는 무언가에 일본인들도 덩달아 열광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걸 보면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좀 다르긴 다른 모양입니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습니다만 에피소드 3편의 일본 대흥행은 뭐 거의 기정 사실인 것 같습니다.
 
2.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에 숨겨져 있는 흥미거리라든지, 이 프리퀄 3편과 나머지 3부작을 잇는 연결 고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매체에서 다루었기에 또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결말을 먼저 내려놓고 그 중간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이야 스토리가 샛길로 갈 염려가 없으니 어쩌면 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가 무려 30년에 걸쳐 작성되었다면 토막난 징검다리를 메우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차피 정해진 길로 갈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보다 설득력있게 제시하면서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려고 무리하기 보다는 '상상할수 있는' 딱 그만큼만 관객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절체절명의 과제였겠지요. 그런 이유로 다소 산만하게 날뛰는 감이 없지 않았던 에피소드 1과 에피소드 2의 분위기가 에피소드 3에서는 어느 정도 제 갈 길을 가는듯 정제되어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소위 '악의 화신'인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면 6편의 이야기를 몽땅 그저 그런 것으로 만들어 버릴수도 있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얼마든지 산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2005년 4월 7일 목요일

&lt;아무도 모른다&gt;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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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순간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할 말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반대로 할 말이 그닥 없어서이기도 하고 하여간 복잡한 심정때문입니다. 지난 일요일 이 영화를 본 이후 3일간 꽤 여러 사람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영화가 너무 좋다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쁘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영화에 대한 일단의 평가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 듯했습니다. 모두들 쉽사리 어떤 말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거라 짐작합니다. 단순히 '슬프다'라는 한마디 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던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니었던 게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이 별로 없는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합니다.
 
2.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화두는 언제는 '생과 사'입니다. 이 사람만큼 한가지 주제에 천착하는 영화 감독도 드물것입니다. 젊은 감독들에게는 특히나 그렇지요. 장르적 유희에 탐닉하거나 영화 만들기를 하나의 재밋거리로 생각하는 감독들을 만나고 그 감독들의 어떤 영화들에 대해 천재성을 거론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될수록 영화에서 철학적이고 진지한 화두를 던지는 어떤 감독을 만나기란 점점 어려운 일이 됩니다. 물론 꼭 어려운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알고 그 그릇안에서 최대한의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언제나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환상의 빛> 이후 10년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나이를 먹어가고 경력이 쌓임에 따라 커져가는 자신의 그릇을 무의식중에 인지해 왔고, 꼭 그만큼의 이야기를 해왔으며 <환상의 빛>과 <아무도 모른다>의 차이는 그 10년의 사이만큼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력이며, 결실이고, 완결이 아니라 과정이었습니다. 차기작 <하나요리모나호>를 완성하기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수 없지만 그것 역시 완결이 아닌 과정의 하나 일 것임은 분명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완결인듯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과정인 것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한 편 한 편이 그 자체의 완결이면서 다음 영화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3. <환상의 빛>의 카메라는 무척이나 정적이고 담담합니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떠한 극적인 순간에도 카메라는 냉정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다는 것처럼 일체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카메라는 무서우리만치 한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피사체가 겪고 있는 모든 순간을 가감없이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이쿠오를 잃은 나오코의 슬픔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입니다. 관객과 피사체 사이에 놓여있는 카메라는 단 10%의 감정도 더하거나 빼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환상의 빛>은 젊은 감독의 데뷔작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지켜 보는 것 외엔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죠. <아무도 모른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스 매체에서 호들갑스럽게 다루기 쉬운 선정적인 소재와 소재 자체가 가진 엽기성, 극적으로 과장할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한 내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생각밖의 차분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고도 남을만한 일입니다. 양쪽 눈에서 굵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손수건을 흠뻑 적시고도 남을 이야기가 정반대의 방식으로 다루어진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의 가슴이 그렇지 않은 영화를 본 것보다 훨씬 무거워지는 것은 왜 일까요? <환상의 빛>과 <아무도 모른다>사이의 10년이라는 적지 않은 간격이 그 답을 말해줍니다.
 
4.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치밀함을 먼저 말해야겠습니다. 아키라 역의 야기라 유야를 비롯한 세 명의 동생과 YOU라는 범상치 않은 가명을 가진 엄마 역의 배우까지 다섯명은 모두 영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소녀로 나온 하나에 칸이 스즈키 세이준의 <피스톨 오페라>에 나온 적이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연기를 해본 배우가 이 영화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환상의 빛>의 주연을 맡은 에스미 마키코나 아사노 타다노부가 그 당시에는 연기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신인 배우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때 고레에다 감독의 이러한 캐스팅 방식은 다큐-드라마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 혹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100% 사실만을 담는 그런 것이라고 믿고 계신 분들이 있을지 몰라 언급합니다만 그만큼 창작자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반영되기 쉬운 장르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주시길 바랍니다. - 이 영화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영화 연기를 하지 못하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그들에게 대본을 보여주지 않은 채 상황 상황을 그저 귀띔해주는 것만으로 촬영되었습니다. 그것도 각 계절마다 2주씩 촬영을 하고 감독은 배우들을 해산시킨채 편집을 하면서 다음 촬영 분량을 계획하는, 상업 영화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무려 1년간에 걸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맏이 아키라 역할을 맡은 야기라 유야는 사춘기에 돌입하여 변성기가 오고, 자연스럽게 극중 아키라또한 변성기가 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직접 밝힌 것처럼 이 영화에는 고레에다 자신의 삶이 반영되어 있고, 야기라 유야 또한 자신이 야기라이면서 아키라인 1년간의 삶이 통째로 녹아있습니다. 실제로 네남매로 나온 배우들은 꼬박 1년간을 극중 모습으로 살아야했습니다. 더벅머리조차 가발이 아니었던 것이죠. 다큐를 방불케하는 극영화 제작 방식은 고레에다 감독의 특기입니다. 다큐멘터리 작가로 출발하여 극 영화 작가로 옮겨간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환상의 빛>, <원더풀 라이프>, <디스턴스>를 거쳐 <아무도 모른다>에 이르기까지 다큐의 어떤 특징을 줄여가면서 극영화적 성격을 강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음 영화인 <하나요리모나호>에서는 전혀 다큐적 성격을 부여할 수 없는 사무라이 시대극을 만든다고 하니 극영화로 옮겨가는 발걸음이 차기작에서 바야흐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영악하게도 일체의 가공의 연기를 배제하고, 조명조차도 아파트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 일색인 <아무도 모른다>는 그렇게 다큐적인 냄새를 풍기고, 과장된 조명이 없기에 평평하기 그지없는 화면을 두시간 내내 봐야하는 심심함 속에서도 기이하게 경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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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다큐인듯하지만 다큐가 아니라 분명한 극영화입니다. 따라서 영화적인 배치와 설정이 등장합니다. 집을 나선 아키라가 어딘가를 가기 위해선 높디 높은 계단을 항상 지나야합니다. 몇달만에 가까스로 집밖으로 소풍을 나선 네남매가 철조망뒤에서 발견한 것은 하수도 블록 사이에서 자란 이름없는 들꽃입니다. 돌보는 이 하나 없고, 존재조차 아무도 모르는 네 아이지만 아이들은 먹고 자고 하루가 지나면 키가 자랍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관객은 위태로움을 느끼고 불안해집니다. 맏이 아키라에게 과연 동생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그 자신이 아이에 불과한 아키라는 금새 유혹에 빠집니다. 공과금을 내야할 돈으로 게임기를 사고, 동생들과 함께 나누어 먹을 식량을 사야할 돈으로 친구들에게 군것질 거리를 사줍니다. 도의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믿는 것들이 이 아이들에게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유혹과 일탈에 대해서도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점점 비참해집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비추어 관객들에게 보여줄뿐입니다. 마치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관객과 아이들의 사이를 의도적으로 떼어놓는 듯합니다.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알고 있습니다. 다가갈수록 의도적인 과장과 감정이 증폭된다는 것을. 아이들의 모습에 점차 드리워지는 그늘을 관객 자신이 느끼는 것 외에는 특별히 무언가를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카메라는 철저하게 간격을 유지하면서 전달합니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그 모습들은 고스란히 관객의 안타까움을 배가시킵니다. 하지만 이 카메라가 그렇게 냉정하고 잔인한 역할에 머무르지는 않습니다. 엄마가 교코의 손에 발라 주고간 빨간 매니큐어가 흔적만 남을때, 막내 유키가 아끼던 아폴로 초코가 단 한개밖에 남지 않았을때, 아키라의 하나뿐인 운동화가 새까맣게 더러워졌을때, 아키라가 유키의 생일날 뽁뽁이 신발을 꺼내주었을때 카메라는 그것들을 잡아냅니다. 겉으로 증폭시키는 큰 감정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 안타까운 속내를 품고 있지 않다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짚어줍니다. 목소리를 높여 윤리적, 도의적 책임을 묻지 않지만, 그래서 모든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머리속에 남지만 그것이 큰 파장으로 되돌아 오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6. <아무도 모른다>에 이르러 고레에다는 카메라에 진정성을 담는 방법을 깨우친듯 합니다. 렌즈 앞에 놓인 배우는 단순한 피사체가 아닙니다. 영화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여만 주면 되는 꼭둑각시도 아닙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에 대한 감독의 진정성이 담긴 영화를 만나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입니다. 왜 유키가 떠난 후에도 아키라와 두 동생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변함없이 유통기한이 지난 편의점 삼각김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시게루는 장난을 치고, 아키라는 그런 시게루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누구보다 큰 슬픔을 겪었어도, 한 아이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났어도, 남은 아이들의 삶마저 끝난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환상의 빛>에서 나오코의 남은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아키라 남매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불행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섣부른 일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더 아파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생과사'라는 절대절명의 화두를 다루면서도 죽음보다는 '삶'을 이야기하는 감독인 이유는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희망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놓아 버리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誰もしらない自分も生きる’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무도 모른다'가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 자신도 살고 있다'는 원래의 제목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기 때문에 우리가 꼭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피할 수 없는 인간 관계망 안에 놓인 우리들이지만, 그래서 타인과 손을 잡고 살아갈 수 밖에 없지만 중요한 것은 '산다'는 그 자체라는 것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강조합니다. 특별히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이지만 그 겸허함은 '영화 만들기'의 근본에 대해서, 나아가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한방울의 눈물보다 강한 물음표를 되새기게 만듧니다.    
 
사족 :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키라에게 그나마의 온정을 베풀어주던 편의점 아르바이트 누나가 왜 영화 중간에 사라졌는지 의아해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유키를 묻고 돌아오는 아키라와 사키 위로 '보석'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흐를때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이 바로 편의점 누나로 출연한 '다케 다카코'였습니다. 편의점 누나는 끝까지 아키라를 돌보아 주지는 못했지만 누나의 남은 감정은 그 노래 가사를 통해 절절히 느낄 수 있더군요.

 

 




< 출처 : 네이버 영화 >

2005년 2월 14일 월요일

맨온파이어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장악한 감성 액션 대작!'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있는 이 영화 <맨 온 파이어>는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토니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토니 스콧이라하면 <탑건>, <크림슨 타이드>, <트루 로맨스>, <라스트 보이스카웃>등으로 한때 영화를 내놓을때마다 박스오피스 수위권을 수월하게 점령하던 감독이자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의 동생이기도 한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설명하는 이유는 그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성이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토니 스콧이 누구지?'라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사람도 없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이 두 형제는 꽤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 흥행의 부침이 심하다는 면에서는 유사하나, 리들리 스콧이 60이 다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글래디에이터>나 <블랙호크다운> 그리고 곧 개봉할 <킹덤 오브 헤븐>과 같은 블록버스터를 찍거나 <매치스틱 맨>류의 드라마를 오가며 일정치않은 행보를 보이는데 비해, 토니 스콧은  줄기차게 인물이 주가 되면서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은 그런 '액션 영화'에 대한 고집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액션 장르에 대한 자신만의 해법을 찾고 있는 듯 하다. 과연 그것이 장차 토니 스콧 자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맨 온 파이어>는 그런 토니 스콧의 고집이 충분히 반영된 영화이다. 같은 이유로 극과 극을 달리는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아야만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박스 오피스 상위권에 꽤나 오랫동안 랭크되었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들이는데 성공했지만 한국에서는 비수기에 개봉되어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비디오 대여점에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성공했지만 한국에서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연배우'의 문제와 '액션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의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할리 조엘 오스먼트 이후 가장 소름끼치는 아역 연기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다코타 패닝과 시드니 포이티어의 뒤를 잇는 연기파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이 보여주는 조화는 두 사람을 투톱으로 내세운 것이 전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두 사람이 미국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을 만큼의 충분한 티켓 파워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 여름 시즌에 개봉할 스필버그의 영화 '우주전쟁'의 30초짜리 TV spot을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다코타 패닝의 압도적인 표정 연기는 그 영화의 주연이 톰 크루즈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맨 온 파이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그저 미국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가능한 일이지 한국에서는 아닌듯하다. 한국의 외화 배급에는 학술적 근거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뢰 가능한 '미신적' 통계가 있는데 그런 사례가 '흑인이 주연인 영화는 배우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흥행에 성공할 수 없으니 비수기에 개봉하라'는 것과 '아역배우가 여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도 흥행 가능성은 없다'는 것들이다. 가끔 이런 영화들 중에서도 관객 동원에 어느 정도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요 몇년 사이와 같이 외화들이 한결같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저런 떠도는 말들에 대한 신뢰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맨 온 파이어>도 그 공식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 시장에서는 별반 힘을 못쓰고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주연배우의 문제와 더불어 '액션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액션 = 비디오용'이라는 약간은 생뚱맞은(?) 등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의 비디오 대여 시장이 활황이던 그때에도 비디오 시장에서 대여 1위를 차지하는 영화는 언제나 '액션 장르'로 분류되는 영화들이었다. 척 노리스의 영화나 스티븐 시걸, 장 클로드 반담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단 하루를 상영하고 내려와도 아쉽지 않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영화들이 상영당시 아무리 푸대접을 받아도 - 푸대접 받을 만한 영화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 비디오 시장에 출시하면 본전은 뽑고도 남을만큼의 성공을 늘 거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액션 영화를 극장까지 찾아가서 보는 몇몇의 매니아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비디오 출시를 목적으로 한 형식적인 개봉이 줄곧 이어졌고, 이는 곧 이 장르가 푸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업자득'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한국 시장의 예를 들어 말하긴 했지만 그것이 비단 이곳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맨 온 파이어>는 이러한 시장 상황하에서 분명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도 아니었을 테고, 배급한 사람조차 성공 가능성을 별로 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두루두루 흥행에 불리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맨 온 파이어>였지만, 이 영화 자체가 아예 함량 미달의 작품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앞서 잠깐 언급한 토니 스콧의 고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토니 스콧은 장르상 액션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영화들을 계속 찍고 있는 감독이다. <맨 온 파이어>는 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30분에 달한다. 스트레스를 확 날려줄 화끈한 액션물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설사 <옹박>에서 토니 쟈가 보여준 것과 같은 입이 떡 벌어지는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해도 그것이 2시간 이상 지속 된다면 결국은 지루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액션 영화가 2시간을 넘지 않고, 스토리 라인의 부실함을 지적받으면서도 짧게 치고 끝나는 것은 관객들이 그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장르 만들기'의 공식에 의한 것임을 생각할때 토니 스콧의 이 영화는 너무 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의 대부분은 덴젤 워싱턴이 맡은 주인공 '크리시'의 심리적 갈등과 드라마로 채워져 있다. 이게 웬 일인가? 액션을 보러 들어갔는데 드라마라니. 알콜중독과 심리적 불안 상태에 놓여 있는 전직 CIA 요원 '크리시'가 유괴 사건이 횡행하는 멕시코시티에서 9살 소녀 '피타'의 보디가드를 맡게 되고 이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다시 찾게 되지만 끝내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는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애시당초 액션물의 단순 명료한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A. J. 퀸넬의 동명의 원작 소설이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까지 합치면 세번이나 영화화 되었다는 것도 그 안에 그만큼의 드라마틱한 매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테고, 거꾸로 토니 스콧이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몇번의 카체이스와 총격전을 제외하면 지극히 소박한 이 영화는 그닥 '액션영화'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크림슨 타이드>가 잠수함 블록버스터를 표방하고 있지만 밀폐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물들간의 갈등 상황이 주가 되었던 것이나, <더 팬>이 스포츠 액션영화처럼 보이면서도 야구 선수와 스토커간의 밀고 당기는 심리 게임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 영화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맨 온 파이어>는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이다. 토니 스콧은 CF 감독 출신답게 여전히 감각적인 화면과 편집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인물'이다. 드라마틱한 시츄에이션에 눌려서 캐릭터가 희생되어 버리는 그런 영화를 원하지 않는 토니 스콧이 늘상 가장 그렇게 되기 쉬운 '액션물'을 찍는 것은 곧 아이러니를 낳는다. 최근들어 부피는 커지고 밀도는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들과의 차이점도 여기에서 나타난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 의식을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려는 토니 스콧의 의도를 <맨 온 파이어>에서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온 파이어>가 훌륭한 걸작은 아니다. 이야기는 길어진만큼 다소 늘어지고, 전체적인 포인트를 잡아내기 힘들만큼 산만하다. 반전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두세번에 나눠져 있다는 것도 이야기의 힘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토니 스콧이 한 장르에 대한 집착과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장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런 고질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맨 온 파이어>는 '액션물'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고 '드라마'로 접근한다면 충분히 볼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선뜻 대놓고 추천하기에 꺼려지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여전히 토니 스콧의 영화는 훌륭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편이다.

 

PS. 토니 스콧의 1986년작 <탑건>이 새로운 스페셜 버전으로 DVD 출시 되었다. 3월 중순경 구입하고 5.1채널로 즐겨본 뒤에 리뷰를 작성할 예정이다. 못다한 토니 스콧에 대한 이야기는 그 때 이어서 하기로 하겠다.

    

 

 

2005년 2월 12일 토요일

[펌] 씨네21에 올라온 황진미씨의 &lt;공공의적2&gt; 비판

내셔널리즘 권하는 영화

<공공의 적2>는 <씨네21> 488호 특집기사가 말하듯 '정치영화’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 영화를 “내 생각이 그대로 대사로 드러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 공공연히 밝히고 있으며, 이 영화의 취지는 “공공의 적에 대해 관객이 함께 분노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 덧붙인다. 문자 그대로 이 영화는 ‘공공의 적’을 전시하고, 적에 대한 ‘공분’(公憤)을 통해 관객의 일체감을 높이고자 만든 일종의 정치선동영화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선동하고자 하는 정치성이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즉 그가 효수(梟首)한 공공의 적은 어떤 적대성을 지니며, 그를 단죄하는 논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처단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려는 일체감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 문제들을 살피면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와 그 효과에 대해 논해보겠다.

이유 1. 서민이나 국민이 아니면 ‘공공의 적’?

‘전편이 패륜아에 대한 분노였다면 후편은 사학재단비리와 정경유착으로까지 사회적 공분의 규모를 확장하여 한국사회의 구조악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한다’(이종도, <씨네21> 488호)는 지적은 피상적으로만 옳다. 가족살해와 이유없는 약자살해는 전·후편의 공통사안이나, 단지 차이점은 ‘악함’이 전편에서는 훨씬 개인에 결부되어 있고, 후편에서는 계급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편의 그가 자본가 계급을 대표하거나, 사학재단비리나 정경유착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좋은 부자를 존경하도록, 너 같은 놈을…”이라는 말로, 그가 나쁜 부자의 표상일 뿐, 자본가 계급일반을 표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사학재단 일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도 아닌데, 안 이사에 의해 눈물겹게 회고되듯 ‘사학의 길’은 분명 ‘명예로운 사도의 길’이며, 그토록 신성한 재단을 계속 운영치 않고 매각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이다. 즉 사학재단의 운영 자체에 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학재단을 팔아치우는 것이 비리’라는 것이므로, 이 영화는 TV 보도물이나 <두사부일체>보다도 사학재단비리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경유착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나? 사건은 수년 전부터 무수히 터져나왔던 ‘*** 게이트’, ‘@@@ 리스트’의 하나일 텐데, 뇌물수수는 다반사이며, 대가성 여부도 불분명하고, 둘간의 연대도 공고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합이 개인 대 개인의 연줄일 뿐 ‘재벌과 정부’간의 구조적인 정경유착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공공의 적’이어야만 하는가?

감독이 그에게 부여한 가증스러움의 핵심은 스스로를 귀족이라 생각하는 미국 시민권자가 사학재단을 팔아서 외국으로 뜨려 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죄상은 첫째, 귀족의식을 갖고 있으며(‘루이 윌리암~스 세바스천 주니어 3세’의 대사, “천한 것들!”이 자주 인용된다), 둘째, 미국 시민권자로 ‘국부’를 유출하려는 것(국민경제의 적)이다. 그가 ‘서민’이 아니고,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분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유 2. 민족주의자 검사 강철중이 인민의 벗?

강철중은 의협심으로 패싸움에 나섰다가 단체기합을 받으면서 세상을 알았다고 회고한다. 패싸움의 군중심리와 단체기합의 폭압성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그는 오직 평등치 않음에 분노한다. 그는 ‘전체주의’ 속에서 ‘평등주의’와 ‘힘(!)’을 갈망하여 검사가 된다. 그는 검찰의 임무를 ‘나쁜 놈들 잡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는 법과 정의를 동일시한다. 아니 법보다 정의를 갈망하여, 법을 어겨서라도 정의를 수행코자 하는데, 그의 정의는 결국 검찰에 의해 법의 지지를 받는다. 법을 벗어나지만 법으로 완수되며, 결국 법은 정의를 싸안는다.

전작의 강철중은 단순무식 과격하지만 적어도 인륜이 뭔지는 아는 정도의 도덕을 지닌 자였다. 그는 정의를 내세운 바 없고, 끝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법으로 비호되지도 않는다. 법과 정의에서 벗어난 최소한의 도덕의 지점에서, 강철중의 육체성이 발화하는 삐딱하고 친숙한 체취가 전작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후편에서 그의 육체는 개인성을 탈각하고, 검찰이라는 기관의 몸으로 탈바꿈한다. 그는 국가기관의 현신(現身)으로서 정의를 구현하는데, 그런 그가 “메리, 마이클, 제임스에게 그 돈이 들어가…, 그 돈이면 결식아동…”이라며 분개하고, 심지어 “월드컵 때 너무 좋아서 빤쓰만 입고 뛰어다녔다”며 소리친다. 실로 내셔널리즘의 극한이다.

한편 “발포하라, 난… 내 사람 다치게 안 한다”며 충성의 사열을 받으며, 아랫사람의 가족을 챙기는 의리는 또 어떠하며, 부자 후배에게 밥 얻어먹고, 청렴한 검사가 되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오밤중에 라면 냄비 박박 긁는 그의 서민성은 또 어떠한가? 강철중의 이미지는 민족주의와 군인정신, 평등주의와 서민정서가 결합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박정희이든 아니든,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대중의 동일시를 통해 동의를 얻어내고자 하는 ‘대중독재의 지도자상’에 완벽하게 수렴된다. 대의민주주의의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민주주의의 열망을 불태우는 그들은 법 절차보다는 정의를 확신하는 강철중과 닮아 있으며, 그들이 정권을 잡고 나면 가장 먼저 ‘정의사회구현’을 기치로 부패정치인과 깡패를 일소하는 것 역시 강철중의 역할과 유사하다.

이유 3. 국가가 정의고, 국민/서민은 선(善)?

강철중이 홍길동이나 장총찬(<인간시장>의 주인공) 같은 야인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현신이라는 사실은 현실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묘한 영웅담이 검찰의 제복을 입고 출현할 수 있는 것은 검찰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이제는’ 희박해졌다는 감독의 정치인식에 기인한 것인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참여정부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의 결과이자,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되는 현 정권의 이데올로기이다. 즉 오랫동안 국가가 충성의 대상이자 투쟁의 대상이었지만, “참여정부에 이르러 국가의 성격이 달라졌으며, 따라서 국가가 정의의 담지체가 될 수 있다”는 정치적 신념은 근대 이후 경주되었던 ‘국민국가 만들기’의 기획이 드디어 완수되어, 진정한 의미의 국민주권시대가 왔다는 선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신념은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 (아무리 올바른 국가라 할지라도) 국가가 ‘정의’의 내용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정의’가 무엇인지 논의되는 공적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는 축소되며,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율적 시민이 아니라 타율적 국민으로 끊임없이 소환된다. 또한 ‘국민’ 혹은 ‘서민’이 아닌 자를 ‘공공의 적’으로 명명하는 순간, 공공성(公共性) 혹은 공공선(公共善)의 문제가 고작 ‘국민-되기’, ‘서민-되기’의 문제로 왜곡된다. 국민/서민은 선(善)한가? 국가는 정의를, 국민/서민은 선(善)을 담지한다는 이 신념이 바로 국가주의와 포퓰리즘의 모토이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의 육체성 속에 은근히 보여지던 포퓰리즘과 <실미도>에서 국가에 의해 살아지고 사라졌던 그들의 존재로 증명되던 국가주의가 <공공의 적2>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합창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강철중으로 표상되는 ‘대중과 정서적으로 동일시되며, 대중에 의해 위임된 강력한 국가권력’이 곧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는 대중독재의 그림자이다. 또한 관객이 공론장을 국가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도색하는 진정한 ‘공공의 적’을 알아보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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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씨의 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언젠가 강우석 감독에 대해 한번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 꽤나 많은 부분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군요. 그래서 퍼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