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등장한 대망의 포스트. 지금까지 추억의 애니음악방을 연재하면서 건드려온 것들은 <세일러문>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다루기가 쉬운 편에 속했던 것들임을 고백합니다.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슨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할지 감이 안잡히는 어려운 것들은 그저 뒤로 미뤄놓고 '언젠가는, 언젠가는...'하면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겁없이 <은하철도999>부터 먼저 건드려봅니다. 노파심에 한가지를 더 먼저 자백하는 심정으로 말하자면 저야 애니메이션을 워낙 좋아하긴 하지만 작품당 파고드는 매니아는 절대 아니고, 특히나 이 카테고리에 올라오는 포스트는 정확한 자료보다는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혹여 오류가 포함되어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 _ _ )
<..999>가 국내에서 첫 전파를 탄것이 1982년이었던가요? 그당시 저는 안타깝게도 이 애니메이션을 방송해주던 MBC가 나오지 않는 시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매달 돈을 지불하는 유선방송을 달지 않으면 MBC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보여주는 MBC도 아마 녹화방송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방송시에는 제대로 이걸 볼 수가 없었지요. 아하, 그런데 이럴수가. 저희 집에 붙어 있는 옆집에서 이 유선방송을 보고 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놀러가서 봤냐구요? 아니죠! 정말 이상하게도 옆집에서 유선을 보는데 우리집 TV에 전파가 흘러들어오더란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튼 형체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MBC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광분한 저는 어머니의 갖은 구박에도 불구하고 지직거리는 그 화면을 자주 틀어놓고 앉아있었습니다. 물론 옆집에서 채널을 바꾸면 볼 수가 없었습니다. (--) 그렇게해서 타는 목마름을 조금 해결하고, 가끔 놀러가던 친구집에 일부러 일요일 아침 8시에 찾아가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띄엄띄엄 이것을 보곤 했던거죠.
다른 포스트에서 말했듯,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비관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색채를 띄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면서 게다가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성인물에 가까운 장면까지 등장했건만 방송에서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채, 만화영화라는 이유로 다 넘어갔던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애니메이션은 전체적으로 반자본 계급투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겠습니까? 외피를 기계인간과의 싸움으로 두르고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엄연히 철이의 엄마를 죽인 기계인간은 기계 백작으로 불리는 상류계급이고 - 심지어 그 엄마의 시체를 벽에 박제해놓고 즐기는 - 철이를 비롯한 인간은 기차표 한 장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하층민이었는데요. 이 이야기가 <하록선장>, <천년여왕>등과 연계되는 마츠모토 레이지 유니버스의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다시 한 번 그 암울하던 80년대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공중파를 탔다는게 신기해지는거죠.
뭐 저는 하록선장이나 천년여왕과 메텔, 철이의 연관성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이미 많은 매니아들이 연표를 만들어 분석해놓았고, 마츠모토 레이지 자신도 어느 정도는 정리를 해주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포스트는 작품 분석을 목표로 한게 아니니까 그건 넘어가려고 합니다.
앞뒤 관계를 알건 모르건,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에 대해 알건 모르건,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 나이에 보기에도 참 암담하고 슬펐습니다. 매회 정차하는 행성마다 누군가 죽거나 버려집니다. 별을 탈출하고 싶어했던 어느 행성의 음악가 청년이든, 영원불멸의 기계 몸을 가지고 싶어했던 어느 처자든, 형체가 일정치 않기 때문에 오히려 정형화된 인간의 몸을 부러워했던 아메바 가족이든 모두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소망을 이룰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좌절해야 하는 갖가지 군상들이 무려 100회 이상 등장했던 겁니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였죠. 장소만 은하계의 온갖 행성들로 벌려 놨을뿐, 지구상에 사는 못난 인간들의 온갖 애환이란 애환은 거의 다 그려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여행을 해야했던 철이는 결국 거의 철학자가 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질리도록 그런 것들을 봤으면 그것이 싫어서라도 기계 몸을 택했을 법한 철이는 거꾸로 그러한 인생의 고통과 환희, 감정의 동요와 진폭이 없는 기계 몸에 환멸을 느껴버립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이 어떤 것인지 죽는 날까지 누가 알까요? 다만 인간으로 태어나 존재하다 간다는 것, 그 자체로도 태어난 의미는 충분하다 생각했던게 아닐까합니다.
눈물실은 은하철도- 김국환
은하철도 999 - 김국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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