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14일 월요일

맨온파이어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장악한 감성 액션 대작!'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있는 이 영화 <맨 온 파이어>는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토니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토니 스콧이라하면 <탑건>, <크림슨 타이드>, <트루 로맨스>, <라스트 보이스카웃>등으로 한때 영화를 내놓을때마다 박스오피스 수위권을 수월하게 점령하던 감독이자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의 동생이기도 한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설명하는 이유는 그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성이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토니 스콧이 누구지?'라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사람도 없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이 두 형제는 꽤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가고 있는데 흥행의 부침이 심하다는 면에서는 유사하나, 리들리 스콧이 60이 다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글래디에이터>나 <블랙호크다운> 그리고 곧 개봉할 <킹덤 오브 헤븐>과 같은 블록버스터를 찍거나 <매치스틱 맨>류의 드라마를 오가며 일정치않은 행보를 보이는데 비해, 토니 스콧은  줄기차게 인물이 주가 되면서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은 그런 '액션 영화'에 대한 고집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액션 장르에 대한 자신만의 해법을 찾고 있는 듯 하다. 과연 그것이 장차 토니 스콧 자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맨 온 파이어>는 그런 토니 스콧의 고집이 충분히 반영된 영화이다. 같은 이유로 극과 극을 달리는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아야만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박스 오피스 상위권에 꽤나 오랫동안 랭크되었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입을 벌어들이는데 성공했지만 한국에서는 비수기에 개봉되어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비디오 대여점에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성공했지만 한국에서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주연배우'의 문제와 '액션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의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할리 조엘 오스먼트 이후 가장 소름끼치는 아역 연기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다코타 패닝과 시드니 포이티어의 뒤를 잇는 연기파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이 보여주는 조화는 두 사람을 투톱으로 내세운 것이 전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두 사람이 미국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을 만큼의 충분한 티켓 파워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 여름 시즌에 개봉할 스필버그의 영화 '우주전쟁'의 30초짜리 TV spot을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다코타 패닝의 압도적인 표정 연기는 그 영화의 주연이 톰 크루즈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맨 온 파이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그저 미국이라는 특정 지역에서 가능한 일이지 한국에서는 아닌듯하다. 한국의 외화 배급에는 학술적 근거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신뢰 가능한 '미신적' 통계가 있는데 그런 사례가 '흑인이 주연인 영화는 배우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흥행에 성공할 수 없으니 비수기에 개봉하라'는 것과 '아역배우가 여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도 흥행 가능성은 없다'는 것들이다. 가끔 이런 영화들 중에서도 관객 동원에 어느 정도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요 몇년 사이와 같이 외화들이 한결같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저런 떠도는 말들에 대한 신뢰감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맨 온 파이어>도 그 공식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 시장에서는 별반 힘을 못쓰고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주연배우의 문제와 더불어 '액션 장르'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액션 = 비디오용'이라는 약간은 생뚱맞은(?) 등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의 비디오 대여 시장이 활황이던 그때에도 비디오 시장에서 대여 1위를 차지하는 영화는 언제나 '액션 장르'로 분류되는 영화들이었다. 척 노리스의 영화나 스티븐 시걸, 장 클로드 반담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단 하루를 상영하고 내려와도 아쉽지 않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영화들이 상영당시 아무리 푸대접을 받아도 - 푸대접 받을 만한 영화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 비디오 시장에 출시하면 본전은 뽑고도 남을만큼의 성공을 늘 거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액션 영화를 극장까지 찾아가서 보는 몇몇의 매니아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비디오 출시를 목적으로 한 형식적인 개봉이 줄곧 이어졌고, 이는 곧 이 장르가 푸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업자득'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한국 시장의 예를 들어 말하긴 했지만 그것이 비단 이곳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맨 온 파이어>는 이러한 시장 상황하에서 분명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작품도 아니었을 테고, 배급한 사람조차 성공 가능성을 별로 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두루두루 흥행에 불리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맨 온 파이어>였지만, 이 영화 자체가 아예 함량 미달의 작품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앞서 잠깐 언급한 토니 스콧의 고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토니 스콧은 장르상 액션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영화들을 계속 찍고 있는 감독이다. <맨 온 파이어>는 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30분에 달한다. 스트레스를 확 날려줄 화끈한 액션물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설사 <옹박>에서 토니 쟈가 보여준 것과 같은 입이 떡 벌어지는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해도 그것이 2시간 이상 지속 된다면 결국은 지루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액션 영화가 2시간을 넘지 않고, 스토리 라인의 부실함을 지적받으면서도 짧게 치고 끝나는 것은 관객들이 그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장르 만들기'의 공식에 의한 것임을 생각할때 토니 스콧의 이 영화는 너무 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의 대부분은 덴젤 워싱턴이 맡은 주인공 '크리시'의 심리적 갈등과 드라마로 채워져 있다. 이게 웬 일인가? 액션을 보러 들어갔는데 드라마라니. 알콜중독과 심리적 불안 상태에 놓여 있는 전직 CIA 요원 '크리시'가 유괴 사건이 횡행하는 멕시코시티에서 9살 소녀 '피타'의 보디가드를 맡게 되고 이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다시 찾게 되지만 끝내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는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애시당초 액션물의 단순 명료한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A. J. 퀸넬의 동명의 원작 소설이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까지 합치면 세번이나 영화화 되었다는 것도 그 안에 그만큼의 드라마틱한 매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테고, 거꾸로 토니 스콧이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몇번의 카체이스와 총격전을 제외하면 지극히 소박한 이 영화는 그닥 '액션영화'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크림슨 타이드>가 잠수함 블록버스터를 표방하고 있지만 밀폐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물들간의 갈등 상황이 주가 되었던 것이나, <더 팬>이 스포츠 액션영화처럼 보이면서도 야구 선수와 스토커간의 밀고 당기는 심리 게임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 영화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맨 온 파이어>는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이다. 토니 스콧은 CF 감독 출신답게 여전히 감각적인 화면과 편집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인물'이다. 드라마틱한 시츄에이션에 눌려서 캐릭터가 희생되어 버리는 그런 영화를 원하지 않는 토니 스콧이 늘상 가장 그렇게 되기 쉬운 '액션물'을 찍는 것은 곧 아이러니를 낳는다. 최근들어 부피는 커지고 밀도는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들과의 차이점도 여기에서 나타난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 의식을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려는 토니 스콧의 의도를 <맨 온 파이어>에서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온 파이어>가 훌륭한 걸작은 아니다. 이야기는 길어진만큼 다소 늘어지고, 전체적인 포인트를 잡아내기 힘들만큼 산만하다. 반전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두세번에 나눠져 있다는 것도 이야기의 힘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토니 스콧이 한 장르에 대한 집착과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거장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런 고질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맨 온 파이어>는 '액션물'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고 '드라마'로 접근한다면 충분히 볼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선뜻 대놓고 추천하기에 꺼려지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여전히 토니 스콧의 영화는 훌륭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편이다.

 

PS. 토니 스콧의 1986년작 <탑건>이 새로운 스페셜 버전으로 DVD 출시 되었다. 3월 중순경 구입하고 5.1채널로 즐겨본 뒤에 리뷰를 작성할 예정이다. 못다한 토니 스콧에 대한 이야기는 그 때 이어서 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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