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8일 금요일

인생의 회전목마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일본 문예춘추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2005년 최악의 영화 3위로 뽑혔다는 소식이 날아온 후로 이 영화를 보고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한 관객들의 평가가 다소 정당성을 얻고 있는듯하다. 한국 관객들의 관람평과 일본 잡지에서 내린 평가는 여러가지 관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을텐데도 그런 저런 구체적인 이유를 다 제쳐 놓고 그저 '실망'이라는 단어로만 결론짓는 것을 보고 있으니 다소 석연치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울...>이 개봉된 이후 가장 먼저 나온 평은 그것이 전작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보다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일반 관람객을 동원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센과 치히로...>였고, 또 가장 최근에 보여진 작품이었으니 비교 대상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2시간 30분이라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서는 거의 금기나 다름없는 긴 러닝 타임을 가진 <센과 치히로...>였고, 스토리 보드 분석을 통해서도 알려진 바와 같이 그 긴 러닝 타임 동안 이중, 삼중으로 겹쳐진 복선적 내러티브를 극영화 못지 않은 깔끔함으로 꾸려낸 점이 있었으니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에 비하면 <하울...>은 분명히 부족한 점이 많다. 상대적으로 짧은 러닝 타임에, 무언가 덤벙 덤벙 지나가는 듯 빠르게 전개 되는 이야기속에 설명이 부족하고, 따라서 관객의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내러티브의 인과성과 캐릭터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다. 씨네21에 게제된 정성일 평론가의 리뷰나, 듀나씨의 글에서도 이런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들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만, 과연 그 이야기들을 전부 수용하면서도 <하울...>이 그저 못만든 작품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유분방한 이야기 전개와 중구난방인 캐릭터들의 행동이 감독의 의도였다고 보는건 지나치게 관대한 일일까? 조금이나마 <하울...>을 옹호하고 싶은데 그럼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끄집어 내야할까? <하울..>을 이해할 수 있는 몇가지 힌트들을 살펴 보려고 한다.

 

 

확실히 60대에 들어선 미야자키 하야오의 행보는 <모노노케 히메> 이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잠깐 참고를 위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를 좀 열어보도록 하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천공의성 라퓨타> (1986)

<이웃집 토토로> (1988)

<마녀의 우편배달부 키키> (1989)

<붉은 돼지> (1991)

<모노노케 히메> (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필모그래피 리스트를 놓고 살펴볼때 <하울...>은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의 우편배달부 키키>와 같이 유럽적 공간을 무대로 하고 있다. 실제 존재하는 유럽을 닮아 있으면서도,  유럽의 현재가 아니라 18, 19세기의 과거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기술 문명을 토대로 하고 있는 가상의 공간이기도 한 미야자키 특유의 '이상향 공간'으로서의 유럽 말이다. '하울의 성'이 그토록 괴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하울의 성'이 지나가는 것을 즐기면서 구경하고, 길거리와 하늘에 마법사가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나머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한 편, 석탄을 때면서 증기 기관으로 움직이는 기차와 자동차가 있는 부조화의 공간이 <하울...>의 배경이다. 한때 미야자키 하야오는 현재의 일본이 너무나 싫고 두려워서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못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가까스로 어렵게 돌아온 일본 배경의 애니메이션인 <이웃집 토토로>에서도 30년이나 40년 전쯤으로 보이는 과거의 일본, 그것도 시골을 무대로 그렸던 것이라고 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한술 더떠 아예 막부 시대의 일본으로 가버렸고, 그나마 현재를 다뤘다고 하는 <센과 치히로...>에서도 '유바바 여관'이라는 판타지의 공간으로 모든 것을 대치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그런 그가 젊은 시절 자신이 즐거워 했던 가상 유럽으로 다시 돌아가버린 것이 <하울...>이다. 다시 돌아간 노스탤지어의 공간에서 '소피'는 전작인 <... 라퓨타>의 '시타'나 '파즈', <...키키>의 '키키'처럼 십대의 어린 주인공이 아니라 90살 먹은 노파가 되어 있다. 어릴 때, 젊을 때 즐겼던 공간에 나이 든 감독이 나이 든 주인공을 세워 놓고 있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영악해지는 거야'라든지  '늙고 나니 더 이상 잃을게 없다는 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되뇌이는 소피의 대사는 황혼길에 접어든 노장 감독의 독백처럼 들린다. 한때 그것이 도피의 수단이고 방법이었다면, 이제는 더이상 잃을 게 없으니 도피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런 배경의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해도 또 누가 돌을 던진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는 늙은 감독의 '배짱플레이'때문에 <하울...>이 만들어 진것이지, 그것을 단순히 '울궈먹기'라든가 반복에 의한 '식상함'으로 치부한다면 다소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 판정이라고 보게 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물론 원작 동화가 유럽에서 온 것은 사실이다.)  예측 불허처럼 보이는 미야자키 행보를 조금이나마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첫번째 힌트도 물론 이것이 되지 않을까한다.

 

 

<하울...>에 전쟁에 관한 언급이 들어가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기술 공헌상을 수상할때에도 베니스에 등장한 단 하나의 '반전 영화'라는 수식어를 받으며 이라크 전과의 관련성이 거론 되기도 햇으나 <하울...>에 원작에도 없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 된 것은 단순히 이라크전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군에 문명과 전쟁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2차 세계대전중 태어나 군수 물품을 공급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거나, 이상적 사회주의자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 적잖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는 물질 문명의 거대한 발전을 거부하고 - 스팀펑크스러운 산업 혁명기의 초창기 기계 문명 발전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 그로인한 군수 무기 산업의 발달과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 나우시카>에서 환경 오염으로 인한 동식물의 멸종을 다루었고, <이웃집 토토로>에서 오염된 도시 문명의 폐해를 거의 받지 않은 시골 마을의 정경을 담는 다거나, 전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아예 인간이기를 거부해버린 <붉은 돼지>처럼 <하울...>에서도 검은 연기와 포화는 하늘을 뒤덮고 주인공 하울은 전쟁을 막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포화에 뒤덮인 소피의 마을 풍경이 이라크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미야자키의 어린 시절, 2차 대전중의 일본과 더 가깝지 않은가? 모든 전쟁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모든 전쟁의 제물이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유란 없다. <하울...>에 전쟁 장면이 있지만 그러한 전쟁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처럼 관객들도 알수가 없다. 일본의 관객들과 다른 나라 관객들에게 <하울...>의 이 전쟁 장면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보이게 되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본은 분명 전범국이지만, 원폭을 두 방이나 때려 맞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터지는 포화는 하나비가 절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쟁을 싫어하는 이유는 전쟁 아래서 태어낳고 전쟁을 보았고, 겪은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반전의식은 어제 오늘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울...>의 전쟁 장면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이것이 두번째 힌트이다.

 

 

남들이 실컷 했던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하늘을 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단지 오우삼의 영화에 성당과 비둘기가 나오는 것 같은 그저 단순한 '클리셰'일까? <하울...>에서도 다 망가진 하울의 성이 마지막 장면에서 걷지 않고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간다. '날지 않으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아니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치고는 참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영화 시작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하울과 소피가 왈츠를 추듯 하늘을 나는 장면이 있고, 설리먼의 성에서 빠져나온 소피가 비행기를 모는 장면이 있지만, 흰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을 나는 하울의 성이야말로 제대로 미야자키스러운 하늘을 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하늘을 난다는 것이 미야자키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한가지 요소인 것은 확실한데 재미있는 것은 이제까지 미야자키 작품에서 가장 날기 힘들만큼 둔중하고 무겁게 보이는 '하울의 성'이 가장 가볍게 팔랑거리면서 하늘을 난다는 사실이다. 덩치는 거의 <미래소년 코난>에 나왔던 기강트 비행체에 비견할만큼 묵직해보이는데 말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설리먼으로부터 도망쳤다던 하울과 하루 하루 목적없이 살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찾고 '별빛의 머리색'을 얻은 소피를 떠올려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진을 본 사람을 알겠지만 이제 그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할아버지가 되었다. 본인이야말로 '별빛의 머리색'를 얻은게 아닌가 싶다. 젊은 시절 그를 무겁게 짓누르던 의식적 무게감으로부터의 해방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좀 더 가뿐하게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 '전쟁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잘만든 작품이 가져야할 치밀한 내러티브, 강렬한 캐릭터에 대한 압박감으로부터도 조금씩 풀려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성'을 팔랑 팔랑 날려보내면서 갈짓자로 움직이는 정신없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도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목적을 위해 일자로 돌진하는 맹목적인 영웅대신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하울...>의 작품성을 한단계 떨어뜨린 것이 되었다 하더라도말이다. <센과 치히로...>를 개봉전 전주 영화제에서 보고 나오는데 누군가 내게 20자평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남겨주었다. '더이상 무겁지 않은 미야자키 하야오, 하늘로 날아오르다'라고. 이제 그것은 <하울...>에 대한 20자평으로 던져 주고 싶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멋진 마법사가 살았고,


나쁜 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90살 할머니가 된 소녀의 이야기.


두 사람은 만났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무서운 전쟁이 일어났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전쟁을 끝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현실의 전쟁이 사랑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만은 적어도 할아버지의 이야기속에서는 그럴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가 앞뒤가 안맞는다고 투덜대는 것이 더 우습지 않은가? 미야자키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옛날 이야기를 자청해서 두번이나 들은 나는 앞으로 10번이고 100번이고 다시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청할 것이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계속 내게 멋진 이야기를 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설사 돌아가신다고 해도 그 이야기는 내가 할아버지가 된 다음에 내 손자에게 또 해줄 수 있을 것이고.


 

길고도 장황한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by Aaro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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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드전기>, <벼랑위의포뇨>까지 지브리의 다음 작품들이 계속 나왔지만 불만족스러운 것이

저뿐만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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